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안 하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나라 풍속에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하곤 하였다.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안 하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나라 풍속에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하곤 하였다.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
처용은 바깥에 나갔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둘이서 함께 자고 있는 지라 자기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그 곳을 물러갔다. 이 때 역신은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Ⅱ. 처용가(신라 향가)의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한 다음 그 중 처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왕을 보필하라고 하며 딸려 보냈다.
무왕(武王)이 지은 4구체 형식의 향가이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민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노래는 무왕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이 노래는 백제 무왕이 소년 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향가 <처용가>는 처용설화의 구조적 일부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처용가>의 성격은 설화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설화의 서술 구조상에서 볼 때 <처용가>는 이 노래의 주체인 처용이 자신의 처의 미모에 미혹된 역신을 ‘감화’시키는 교화가무(敎化